“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인식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렸다”고 아도르노는 탄식했다.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라는 세기적 비극을 겪으며 그가 의심한 것은 계몽된 인간이성 그 자체였다. 그에게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는 예외적 독재자가 저지른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합리와 이성, 효율과 수량화를 통해 자연을 극복하고 자기보존을 이루려던 인간은, 자신의 도구에 의해 그 스스로의 존재마저 위협받는 처지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는 묻는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대체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죽이려드는 것일까.
사진 / 새만금은 농지확보라는 명분으로 시작해, 투자와 개발이라는 우리시대 불패의 부동산신화로 귀결되고 있다. ‘변질’이라는 사뭇 도덕적인 판단도, ‘용도변경’이라는 행정적 수사도 불필요하다. 이 상황은 사실상, 계획된 것이었으므로. 저마다 내심 기대하고 원했던 일이었으므로. 한때 풍요로운 왁자지껄로 가득했던 갯벌과 어촌마을은 을씨년스런 몰락지가 되어가고 있다.
정부의 말대로라면, 그 말이 사실이라면
새만금간척사업은 바다를 메워 부족한 농지를 확보하겠다는 단순명료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서 부안을 잇는 총길이 33km의 방조제를 축조하고, 그 안에 흙을 쏟아 부으면, 40,100ha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넓이의 토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밑그림이었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달한다.
농지가 점차 축소돼 가는 비좁은 나라의 처지에서 새만금사업을 통한 농지확보는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사지을 땅을 확보해야 한다는 정부의 기특한 생각은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무부처인 농림부는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이 30% 미만이므로 식량안보를 위해서라도 쌀을 생산할 농지의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수십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더라도 그것은 진행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1991년 11월 공식적으로 간척공사가 시작된 이래, 2006년까지 새만금에는 네 개의 방조제와 두 개의 배수갑문이 세워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수차례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새만금사업에 관한 한 정부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새만금사업단이 내놓는 청사진은 밝고 역동적이며,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이다.
“새만금사업을 통해 우리국민은 국민 한 사람당 2평의 땅과 1평의 담수를 갖게 되었다.”
“새롭게 생겨난 비옥한 토지에는 식량작물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각종 원예 및 사료작물 등을 다양하게 재배할 수 있으며, 이는 낮은 식량자급률, 시장개방에 따른 농업경쟁력 확보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규모화·집단화된 우량농지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UN이 정한 아시아 유일의 물부족 국가로서 새만금사업이 완공되면 중규모 저수지 200개의 수량에 해당하는 10억톤의 수자원을 확보할 수 있어 미래의 물 부족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33km의 방조제가 완공되면 군산 부안 간 교통거리를 66km나 단축시킬 뿐만 아니라, 섬지역의 교통환경을 개선하고, 변산국립공원 등 천혜의 관광자원과 어우러져 세계적인 관광권을 형성,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정부의 말대로라면, 새만금간척사업은 옳은 일이다. 정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진 / 새만금을 자기식대로 쓰려는 이들은 차고 넘친다. 미공군은 스텔스기의 이착륙을 위한 유도등 시설을 새만금으로 길게 설치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넓은 기지를 놔두고, 새만금에서 불법적인 폭팔물처리를 자행해 왔다.
'불가피한 선택’이라 부르는 말들
그러나 새만금사업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18년의 긴 시간동안 격렬한 논란에서 자유로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새만금사업은 숱한 반대론과 싸워야만 했다. 그 숱한 반대론들은 새만금사업의 근본을 묻는 것이었다. 본질을 묻는 것이었다. ‘농지확보’라는 껍데기 속에 감춰진 내면을 들추는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새만금’을 입력하면 어떤 정보를 가장 많이 찾을 수 있는지, 어떤 이들이 ‘새만금’에 가장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보다 쉬운 방법으로 나는 인터넷 검색창에 ‘새만금’과 ‘두바이’를 동시에 입력해 볼 것을 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새만금사업의 아이러니이며, 본질이다.
이 참담한 본질 앞에 “농지확보를 통한 식량주권 수호”라는 슬로건은 헛소리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국민 한 사람당 2평의 땅과 1평의 담수를 갖게 된다”는 약속은 낭만적 통계치가 던져준 환상일 뿐, 손아귀 속의 현실이 될 리 없다는 담백한 사실을 알려준다. “세계간척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역사”이며,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이 일궈낸 아름답고 웅대한 세계최장의 방조제”가 대체 왜, 누구를 위해 만들어 지는 것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 뒤에는 끈적이는 침을 흘리며 아가리를 벌린 괴물이 버티고 서 있다.
내친 김에 그 너른 갯벌에 살던 숱한 생명체들과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풍요로움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갯벌과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들이 어떻게 절망으로 내몰렸는지, 이웃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게 한 이간질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결국 이 사업으로 소수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 모두가 잃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면, 괴물은 주저 않고 우리를 삼킬 것이다.
그것은 괴물의 카르텔이었다. 저마다 한 몫을 챙길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의 카르텔. 저마다의 몫을 ‘더’ 챙기려는 과욕의 카르텔. 내 몫을 챙길 수 있다면, 남의 것쯤은 빼앗아도 좋다는 약탈의 카르텔.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유권자를 얼마든 속이고, 감언이설로 녹여드리겠다는 선거의 카르텔. 무엇이든 파헤치고 세우고 밀어붙여서 개발이익만 내면 된다는 건설토목의 카르텔. 지식에는 영혼이 없으므로 얼마든 정보와 논리를 제공하겠다는 매판지식의 카르텔.
새만금사업단은 여전히 “새만금이 농업한국을 이끌어갈 주역이 될 것”이라 떠들지만, 이제 그걸 믿는 사람은 없다. 그걸 믿고 싶은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해서는 ‘남는 게’ 없다는 걸 모두가 안다.
때맞춰, 정부는 새만금 토지이용 구상을 발표하고 농지를 대폭 줄이는 대신 산업용지를 대거 늘이고, 이를 위해 총사업비를 18조9천억원으로 증액하기로 했다. 새만금은 이제 녹색성장이라는 국정철학을 실현시킬 산업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러한 용도변경은 변화된 국내외적 여건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이며,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언제나 말은 멋있다.
사진 / 인간의 세계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현장’이며, 승자독식과 약자몰락의 경험세계라는 걸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사회 내부의 질서는 ‘인간 대 자연’으로 확장된다. 새만금은 인간이 인간을 놓고 벌인 게임인 동시에, 그것의 귀결은 미련 없는 생태계의 파괴였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지만, 군림했다고 굳게 믿지만, 자연은 ‘복수’로써 그 어리석은 착각에 균열을 낸다. 자연의 복수는, 저지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의 하잘것없는 오만을 실컷 비웃을 것이다. 그 참담함을 알면서도, 예측하면서도, 사례와 경험은 그저 정보일 뿐 눈앞의 이익은 아니므로 무시된다. 인간은 인간과 쓰레기를 구분하지만, 자연은 인간과 쓰레기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복수의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저문 강에 삽날을 칠하고
새만금사업을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누가 뭐래도 새만금사업은 진행된다.
하지만 숨길 수는 없다. 녹색과 고도성장은 함께 할 수 없는 가치라는 사실, 삽날에 녹색 물감을 칠한다고 해서 그게 친환경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거짓은 늘 포장술 뒤에 숨는다는 그 사실.
지금 우리의 판단이 옳다면, 미래에도 옳을 거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자신이 아닌 모든 타자를 도구로 전락시킨 인간의 종착지는 그 자신의 도구화일 뿐이다. 새만금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의 삶’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야만의 현장이다.
“인간은 단 한 번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적이 없다”는 헤겔의 진단은 새만금 앞에서 더욱 씁쓸하다.